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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1차세계대전

1차세계 대전 개전 - 전개

by stem44 2020. 5. 13.

1차세계 대전 개전 - 아들의 질문의 답을 찾다보니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궁긍증이 점정 생겨 났습니다.

 

그래서 1차세계 대전 개전과 주요 전투 결말에 대해 정리하려 합니다.

 

A. 선전포고.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 소속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 부부가 암살당하면서 이에 분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이 열리게 됩니다.

 

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슬라브족)총동원령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무시되자 다음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최초로 주변국을 침공한 것은 독일이었습니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에 8월에 서쪽으로 진군하고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지상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하였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합니다.

 

동맹국 현황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동맹,) <-> (영국, 프랑스 러시아 협상)

1914-06-28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 세르비아에서 저격 암살
1914-07-28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
1914-07-30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보호 명목으로 총동원령
1914-08-01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1914-08-03 프랑스가 독일에게 선전포고 
1914-08-04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벨기에 침공이 원인

발칸반도에서 이루어진 선전포고가 독일 중심으로 유럽 전지역으로 확산 되었습니다.

 

 

B.전쟁 전개

 

1914년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합니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을 공격했지만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립니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됩니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는 것에 실패하게 되었고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독일입장에서는 전력의 분산되며 자신의 가지고 있는 전투력을 한곳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 중심으로 서부와 동부 전선

전선  
동부전선 독일-> 러시아간 전투
서부전선 독일-> 영국, 프랑스 간 전투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갑툭튀)이 영국과 함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칭다오 맥주가 기술이 발전한 이유는 독일에서 맥주 제조 기술을 전수함)를 침공해 점령했다.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을 시도했지만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다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괴멸되었다.

 

동맹국과 협상국 간의 상호 전력에 타격을 주며 전쟁을 전개합니다.

C.서부전선의 처참한 참호전

특정 전략지 방어를 위해 땅을 파고  병사 와 장비를 집어넣는 인공구덩이.

참호 : 특정 전략지 방어를 위해 땅을 파고 병사와 장비를 집어넣는 인공구덩이. 

 

더 진격할 수 없게 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프랑스 방면의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서 참호를 팠고 연합군도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참호전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도 참호전이란 교리가 없었으며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 방어에 유리한 무기는 발달했으나 참호 돌파를 위한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기에 양측은 효과적인 전진을 하지 못하고 인명피해만 늘어가는 소모전을 치르며 대치하게 됩니다.

 

1914년 12월, 대부분의 군인들이 집에서 보내리라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자 서부전선에서 대치하던 연합군과 독일군은 암묵적으로 휴전한 채 각자의 참호에서 조촐한 축하행사를 가졌으며 기적적으로 서로 총을 거두고 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가 가자 다시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D.오스만제국 ,인도의 참전

오스만 제국은 이 시점까지 눈치만 보며 슬라브족에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 하였습니다. 1914년 7월에 영국에서 만들어지던 오스만 전함 두 척을 동맹국 병기라는 이유로 영국이 부당하게 압류하였다. 8월에 독일은 오스만에게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하고 전함 두척을 양도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합니다. 그리고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 해군이 지휘하던 이 두 전함은 10월 말에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 공격해 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해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곧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국령 인도군도 자치권을 강화시켜준다는 영국의 꼬임에 넘어가 영국군에 가세한다.

1914-07  영국-> 오스만 제국의 전함 압류
1914-08 독일-> 오스만 제죽에 전함 두척 양도
1914-10 오스만 -> 러시아 세바스토폴 항구 기습공격
1914-11 러시아 -> 오스만 선전포고

 

E.늘어나는 참전국 - 미국은 아직....

1915년 1월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의 연결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공격하였으나 점령에 실패한다.

1915년 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해 협상국의 상선 등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킵니다. 
하지만 5월에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며 미국인 128명이 죽자 미국의 참전여론이 거세졌으나,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취하하기로 하여 미국도 이를 인정하고 화를 잠재웁니다.


잠수함 작전은 효율적이어서 영국의 해상력을 약화시키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철은 1915년 2월 영국의 꽉 막힌 서부전선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센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1915년 4월부터 다시 지상군을 동원해 오스만 제국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1월에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된다.

 

전쟁은 미궁속에 빠지게 되며 상호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한편 4월의 이탈리아 왕국은 결국 3국 동맹(독일팀)을 공식적으로 배신하여 협상국(영국팀)에 가담한 뒤 1915년5월에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동부전선에서는 8월에 독일군이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바르샤바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독일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하기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으며, 거리도 너무 멀었고 애초에 동부는 독일의 양면 전쟁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우선순위는 프랑스 파리있듯합니다.

 

보이지는 상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부전선을 러시아와 대치 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의 병력이 서부 , 동전의 모든곳에 주력으로 3국 협상국과 맞서 싸우는 현상이였습니다.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독일팀)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가 고전하던 세르비아 방면의 전투는 물론 발칸 반도 지역의 정세가 동맹국에게 유리하게 넘어온다.

 

포르투갈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6년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이 포르투갈의 항구에서 독일 배들의 나포와 화물 압수 등을 요구하자 독일은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중립을 포기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지만.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의 지휘를 받았으며, 보병 55,000명과 포병 1,000명이 참전했으며 그 중 전사 8,145명, 부상 13,751명, 실종 및 포로 12,318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80척의 포르투갈 국적 선박이 독일 잠수함대의 공격으로 침몰당했습니다. 포루투갈 입장에서는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하여 2만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는 참혹한 결과를 나았습니다.

 

국가 추가 참전 배신 국가
영국팀(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포루투갈) 이탈리아,포루투갈  
동맹팀(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 오스만제국) 오스만제국, 불가리아 이탈리아

 

F.수백만명의 사상자 하지만 아직도.....

1916년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투는 격화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만 200만명이 살상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전황은 크게 변한게 없었습니다. 다만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은 전력이 약해져 서부전선에서 방어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6년 2월 세르비아 왕국을  점령습니다. 하지만 1916년 6월에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맹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러시아 역시 여전히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으며 피해는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 1916년 말까지 500만의 병사가 사상당했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국내의 불만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중동의 아랍 부족들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을 영국이 지원하여 6월에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서 수세에 몰린다.  -영국의 심리전에 오스만 제국의 혼란을 맞음

G.끝판왕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

독일은 1916년 2월부터 서부전선의 고전으로 인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합니다.

미국은 치머만 전보 사건(독일이 미국의 인접국가이며 당시 적국이였던 멕시코 편을 들겠다는 전보) 을통해 독일 등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치머만 전보 사건이 동기 되었던 것이지만 미국은 언제든지 전쟁에 참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하게 징집한 병사들의 훈련 등을 이유로 미국은 전쟁 참여에 조심스러웠고, 1916년 6월부터 프랑스에 훈련이 끝난 소규모의 미군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5월까지도 큰 교전을 하지 않았다.

1917년에 들어서 러시아 2월 혁명이 터져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의 체제가 전복된다. 하지만 새 정부는 여전히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려 하였으며, 내부적 불만 요소는 그대로였기에 사회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돕니다.
1917년 3월에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곧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된다.

 

1917년 4월에 독일은 혼란한 러시아로 망명중이던 레닌을 기차에 태워 귀국시켰다. 레닌의 혁명이 성공하면 독일과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의 내부 상황이 혼란으로 치닫자 프랑스와 영국은 초조해졌고, 서부전선에서 4월부터 연이은 연합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며 7월의 치열한 파스샹달 전투까지 펼쳐졌지만 대량의 인명이 소모된 것에 비하면 작은 승리였으며, 전략적으로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레닌 혁명은 독일 입장에서 서부전선에 군사 전력을 집중시킬 기회임


한편 이탈리아 왕국과의 연이은 전투에서 압박을 느끼던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전선에만 집중하려고 동부전선에서 발을 뺀다. 이후로 사실상 동부전선은 독일 혼자 담당하며 이탈리아 방면의 전선마저도 독일이 지원해야 하는 눈물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10월에 펼쳐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전투로 이탈리아가 주춤하며 방어로 돌아서자 독일은 마무리하고 서부전선으로 집중한다. 하지만 1918년에 들어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공세를 펴다 이탈리아에게 수십만의 사상자를 연달아 내버린다. 


1917년 10월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 체제가 전복되고, 11월에 레닌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독일과 강화한다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나 영국은 큰 위기감을 느꼈지만 사실 독일 역시 이미 인적 경제적 손실이 누적되어 국가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러시아에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러시아 내전이 시작된다.

1918년 1월에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 14개조를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핍박받는 민족과 국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나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게는 종전 후 분열을 가져오는 치명타가 된다.

 

모든 참전국들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전쟁이전보다 휠씬 안좋은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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