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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1차세계대전

[아들의 질문] 아빠 전쟁은 왜 일어나?

by stem44 2020. 5. 12.

[아들의 질문] 아빠 전쟁은 왜 일어나?

지난 주말 6살 아들과 집에서 '괴물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근데  아들이 뜬금없이 '아빠 전쟁은 왜 일어나?' 하고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하여 아들의 눈을 회피했다. 아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정말 궁금한 듯 계속 나에게 물어왔다. 난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다는 핑계를 대고 스마트폰으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전쟁의 이유;. '전쟁의 원인' 등등 폭풍 검색을 했다.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이유가 나열되었다.

화장실에 나온 나는 의기양양하게 '종교적인 이유와, 정치적 이유,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전쟁이 발발해.' 

아들은 또다시 나에게 질문을 했다.

'책에서 봤는데 탱크가 나온 1차세계대전은 왜 일어났어?' '아~~ 어렵다'

난 '독일이라는 나라가 일으켰어' 단순하게 말하고 순간 모면했다. 하지만 난 아들의 질문에서 1 차세계 대전이 왜 일어난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다.

 

1. 1차세계대전의 발생원인을 알기위한 배경 지식 필요. (1부)

때는 20세기 초반,세계의 열강 국가들은 제국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며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열강들은 근대화 이후 막강한 국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식민지를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유럽 축구를 지배하는 아프리카인의 근원이 됨)

 

 

영국의 식민지 땅따먹기

 

 

 

식민지에 의한 이득을 늘리기 위하여 영국은 3C정책을 실행하였다. 3C정책이란 카이로, 케이프타운, 콜카타를 점령한 다음 연결하여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정책이다.


독일은 3B정책을 실행하였는데 3B정책이란 베를린, 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점령한 다음 연결하여
철도부설과 그 주변의 이권 개발을 목표로 한 정책이다.

 

 

 

 

독일 :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
영국 : 카이로, 케이프 타운 콜카타
전세계 국가를 식민지배 할려고하는데 3B정책과 3C정책은 식민지나라가 교차되어 갈등을 야기 시킬 불씨를 지피웠다.영국과 독일간의 갈등의 시작이된다.

 <당시 유럽의 한일 관계 프랑스-독일>

당시 독일 제국과 프랑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 나라의 힘은 대등했으며 과거 1807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프로이센(독일)점령한 적이 있었고 그 후 1871년에는 프로이센(독일)이 힘을 길러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를 점령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자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범게르만주의를 외쳤다.
같은 게르만 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1879년 동맹을 맺어 ‘2국 동맹’을 체결한다.

(19세기 프랑스와 독일 관계는 현재 한일관계와 같은 감정 골이 깊은 상태)

 

범게르만주의란 게르만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는 사상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게르만 민족을 통합하기 위해 독일이 내세운 사상이다.

 

이후 프랑스는 1881년 이탈리아가 노리고 있던 튀니지를 점령하는데 이에 이탈리아는 프랑스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다. 게르만족 국가는 아니지만 이탈리아는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2국 동맹은 3국 동맹으로 변화하게 된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가 ‘3국 동맹‘을 체결하자 프랑스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1891년 러시아(독일 인접국가)와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맺는다.

이후 1904년 독일을 견제하고 있던 영국(3B정책,3C정책으로 인한 대립) 프랑스는 ’영국·프랑스 협상’을 맺고 1907년에는 ’영국·러시아 협상’이 맺어지면서 프랑스, 러시아, 영국이 ’3국 협상‘을 결성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20세기 초반 유럽은 독일이 주도하는 ’3국 동맹‘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3국 협상‘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된다.

 

 

 

3국 동맹(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VS 3국 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의 대립 구도 형성됨  

 

20세기 초반 유럽은 독일이 주도하는 ’3국 동맹‘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3국 협상‘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현상이였다.

<슬라브 족 오스만으로 독립-베를린 회의>

이때 슬라브 민족 국가인 러시아는 19세기 때부터 ’범슬라브주의‘를 외치고 있었다.

 

’범슬라브주의’란 슬라브 민족은 우수하고 하나이며 서로 뭉치고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러시아를 제외한 슬라브 민족(동유럽 국가)의 근대화는 더디였고 오스만제국의 식민 상태 였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슬라브 민족을 결집하기 위하여 러시아가 내세운 사상이다.

19세기 초반 발칸 반도에는 수많은 슬라브 민족이 살고 있었다.당시 발칸 반도의 대부분은 튀르크족 국가인 오스만 제국(터키제국)이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과거에는 강대한 국가였지만 근대화에 실패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는 등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쇠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자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한다.1817년 슬라브족 국가인 세르비아가 자치국이 되었다.

1877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슬라브 민족 국가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고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던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게 된다.

1878년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는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고, 불가리아 공국은 자치국이 되게 된다.

산스테파노 조약을 개정하기 위하여 1878년 독일의 주도 아래 유럽 열강들은 베를린에서 ‘베를린 회의’를 주최하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 회의에서 맺어진 베를린 조약에 따라 187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합병되게 된다.

보스니아(슬라브족)과 오스트리아(게르만족) 상호 다른 민족간의 동침이 1차세계대전 사라예보 사건의 트리거 역할을 한다.

<갈기갈기 찢긴 발칸반도>

1878년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많은 슬라브족이 거주하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합병하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던 러시아, 세르비아와 마찰을 빚게 되었고 이는 삼국 협상과 삼국 동맹의 충돌로 이어졌다.

3국 동맹팀(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  <-> 3국 연합(러시아 - 프랑스 -영국)

<"왜 베를린 회의에서 보스니아 지역을 오스트리아와 합병했는지??">

 

이후 1908년 불가리아(슬라브족)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게르만민족)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슬라브족)를 완전히 합병했음을 선포했다.

 

 

발칸동맹국(불가리아, 세르비아, 몬네네그로, 알바니아)-슬라브족

발칸 동맹국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1912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발칸 전쟁이다.

 

1913년 발칸 전쟁은 발칸 동맹국들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써 발칸 반도의 오스만 제국 영토 대부분이 상실되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지방의 영토 배분에 대하여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대립하게 되었고 같은 해인 1913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이 제2차 발칸 전쟁이다.
전쟁은 불가리아의 패배로 끝났고 이로써 불가리아의 영토 일부가 상실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사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이자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내인 조피와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이름의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사라예보 사건이다.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인으로 세르비아 군대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인 흑수단의 일원이었다.
흑수단은 사라예보 사건의 주범인 조직으로 사건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그리고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에서 암살에 사용한 폭약과 권총 등을 세르비아 정부가 지급했다는 자백이 나왔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사라예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결심하고는 세르비아 정부가 사건에 관련되었다며 7월 23일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대부분의 요구는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번째 내용과 같은 요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최후통첩의 일부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이리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발발하게 된다.

 

주요키워드 세부내용 비고
3국 동맹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독일,이탈리아 범게르만 주의, 프랑스에 대한 앙심 이탈리아
3국 연합 프랑스 , 영국, 러시아 독일견제 세력
3B 정책 베를린, 이스탄불, 바그다드 독일 식민정책
3C 정책 카이로, 카이프시티,콜카타 영국 식민정책
프랑스- 독일관계 유럽의 한-일 관계 상호간 식민통치 , 인접국가
민족 연합 게르만, 슬라브족  
베를린 회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차 발칸전쟁 발칸동맹국(불가리아, 세르비아, 몬네네그로, 알바니아)-슬라브족-오스만전쟁 발칸동맹국의 승리
2차 발칸전쟁 불가리아와 발칸동맹국 전쟁 발칸동맹국 승리
사라예보 사건 1차세계대전 선전포고  

여러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유럽 열강들의 갈등은 심화되어 있었다. 식민지 국가의 확장과 자국민족의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정책들이 1400만명의 사망을 일으킨 1차세계대전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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