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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

친일파를 등용한 XXX이승만..이름만 들어도 화가난다.

by stem44 2020. 5. 22.

친일파를 등용한  XXX 이승만이라고 제목을 지은 이유는 앞에 새글자는 글을 읽고 판단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다.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지로 권력을 차지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반공주의(때려잡자 공산당)을 표방하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친일파 등용 -> 이승만의 개소리.

 

 

 이승만은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일제의 행정조직에 복무하였던 친일 관료들을 불러모아 요직에 기용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담화문에서 " 과거의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나라를 세우는 앞날의 사업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로 반민특위 활동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아~ 정말 화가 나는 대목입니다... 부부의 세계 이태오가 내가바람핀것에 매달리기 보다 앞으로 준형이를 위해 우리 서로 용서하자 하는 소리 같았다.

 

또한 반민특위가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을 체포하자

이승만왈 "반란분자, 파괴분자의 살인 방화와 지하공작으로부터 치안을 보호해야는 시기에 유능한 경찰(노덕술)을 잡아들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 라고 함

-이승만! 적당히 하자. 

 

이승만은 친일파   반민법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개정하려고 시도했다.

친일파의 필사적 반격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세력은 이사건을 빌미로 날마다 파고다 공원에 모여 국회안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라는 데모를 벌였다.

반민특위는 시위 군중 가운데 한명을 친일파로 연행했다. 그러자 시위 군중은 반민 특위 본부로 몰려가 " 반민 특위는 빨갱이 앞잡이다". " 공산당과 싸운 애국지사를 잡아간 조사위원들은 공산당이다"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박근혜 특검사무실에서 시위하는 태극기 부대를 연상케 한다...)

치안은 이미 친일파 묵인한 이승만 정부

반민 특위앞에 시위대로 인해 반민 특위는 서울시경에 사무실 경비를 요청했지만 경찰은 이를 묵살했다.

할 수 없이 직접 시위 해산에 나선 반민 특위는 대책회의를 열어 사태를 검토한 끝에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 주임 조응선을 구속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친일세력은 반민 특위에 총공세를 나섰다.

1.서울시경들은 " 반민특위 간부의 교체, 반민 특위 특경대 해산, 경찰관의 신분 보장" 집단적 사표

2.6월 6일 특위 사물실 공격하여 35명의 특위 직원 폭행 및 납치

3.반민특위가 친일세력에게 뇌물을 받는다는 불미스러운 풍문을 남"

4.이승만정부는 혐의자 명단을 정부에 넘기라고 권유했지만 거부했다는 괴소문을 퍼뜨림

5.결정적으로 특위위원 포함한 8명의 국회의원이 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당함

(1949년 부터 시작된 빨갱이 프레임)

 

그리하여 국회는 특위 활동기간을 축소하는 개정안을 통과 시켰고. 특위위원도 대부분 교체해 버렸다. 반민 특위는 그간의 조사활동을 마무리짓고 1945년 9월 5일 공식 활동을 마감당했다.

 

36년 식민지배.. 친일로 처벌 받은 사람은 몇명?

일년 남짓한 활동기간 동안 반민 특위는 300명을 체포했다. 자수한 자는 60여명이었다. 그러나 재판에서 죄를 선고 받은 자는 12명이였고 그나마 집행유예로 5명은 풀려났다.실제 형벌 받은 7명도 재심을 청구하거나 감형, 형집행정지로 모두 석방 되었다.

즉 대한민국에서 처벌받은 친을 민족반역자는 단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가슴아픈 역사적 사실이다. 만역에 1949년에 친일파에 대한 처벌을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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